[안재훈 감독의 영화편지] 이 영화를 보았더라면, '산양들'

안재훈 칼럼니스트 / 기사승인 : 2026-08-06 14:00: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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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V 프로그램 '나는 자연인이다'를 볼 때면, 어떤 분들이 혼자만의 자연으로 돌아가 자연인으로 살게 되는지 생각하게 된다. 내가 알 수 없는 사연과 사정이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어린 나이에 자연인이 된다는 건 어른의 자연인과 무엇이 다를까. 삶의 여러 경로를 거쳐 자연에 도달한 어른과 불확실한 삶에서 숲으로 도망친 아이들은 같은 경지에 있는 걸까.

자신들의 아지트가 철거되는 모습을 본 어린 자연인들의 태도는 의외로 담담하다. 언젠가 끝날 것을 알고 있었기에 그저 끝내주기만을 바랐던 것일 수도 있고, 어떤 일이든 끝이 있다는 사실을 몰랐기에 막상 그 순간과 직면했을 때 어떤 태도를 보여야 할지 몰랐던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아이일 때 저지른 일들은 결국 성장을 만들어낸다. 특별한 척하지만 하나도 특별하지 않다고 말하는 아이들의 특별함, 그 평범한 아이들의 모험과 일탈을 보는 것만으로 행복하다.

 


그 나이이기에 가능한 발상, 일어날 수 없을 것 같은 일들이 일어나고 정작 일어났으면 하는 일들은 일어나지 않는 시간이 영화로 만들어진다. 이 영화를 보며 행복했던 이유도 다른 누군가가 아닌, 이미 나를 거쳐 간 이야기이기 때문일 것이다.

 


교실 구석의 외톨이 인혜·서희·정애·수민은 '수시면접반' 주변을 맴도는 학생들이다. 미래에 대한 계획을 적어내라는 숙제에 답하지 못한 네 사람은 특별관리대상으로 분류된다. 특별하지 않으면서도 혹시 특별하지 않을까 기대하는, 그렇게 특별하지 않은 아이들로 명명된 셈이다.

인혜의 남자친구 찬영은 인혜 부모님이 운영하는 식당을 학생회장 선거에 이용하지만, 그럼에도 그녀는 찬영을 좋아하는 일을 멈추지 못한다. 그러던 어느 날 인혜는 도로에서 차에 치여 죽은 동물이 나온 방향을 따라가다가 숲속의 고요한 공간을 만난다. 이후 서희를 데리고 버려진 평원을 다시 찾는다. 하지만 두 사람은 학교 사육장에서 데려온 오리 '희선이'를 그곳에서 잃어버리고, 대학 면접까지 땡땡이를 치며 희선이를 찾으러 나선다.
 


어느 날 학교 사육장의 동물들이 살처분될 것이라는 소문이 돌고, 아이들에게는 처음으로 '구하고 싶은 것'이 생기며 이 일을 계기로 서로 힘을 합치기 시작한다. 그렇게 아이들이 숲속 야영장에서 서로의 속마음을 털어놓고 있을 때 찬영이 들이닥치고, "예전에는 말을 잘 들었어", "지금 꼴 좀 봐"라는 비난을 듣는다.

게다가 폭풍우로 아이들의 아지트였던 야영장마저 무너진 날, 인혜는 마치 전투를 앞둔 병사처럼 온몸에 흙을 칠하고 찬영의 집으로 향한다. 그리고 찬영이 자랑스럽게 여기는 학생회장 임명장에 흙 도장을 찍고 집 안 곳곳에 흔적을 남기며 엄마에게 혼날까 전전긍긍하는 찬영에게 마침내 이별을 고한다. 인혜는 그 순간 숲속 아지트와는 또 다른 자유를 느낀다.
 


한편 조류인플루엔자로 결국 학교 사육장이 폐쇄될 상황에 놓이자, 넷은 힘을 모아 소동물 구출 작전을 시작한다.

"생존하려면 항상 대용품을 가지고 다녀야 해."

작품 중 서희의 대사다. 어릴 때는 참 쓸데없는 준비를 하곤 했다. 그러나 어린 시절의 쓸데없는 일들은 어른이 되어 쓸모 있는 무언가를 만나는 계기가 된다.

이 영화에서 다소 우스워 보이는 아이들의 모든 쓸데없는 행동이 훗날 어떤 방식으로 쓸모 있게 될지 기대한다. 그래서 어린 시절의 쓸모없음을 용서하게 되는 동시에 지금도 꿈꾸는 이들의 쓸데없음을 응원하게 되는지도 모른다.

정애는 사육장을 꾸민 인혜와 그 일을 함께 도운 서희의 손재주를 칭찬한다. 칭찬을 처음 들어본다는 서희. 정애의 특별함은 바로 그 칭찬에 있다. 그리고 오리와 이별하며 '그 모습'을 보게 된 아이들. 그 순간이 어쩌면 아이들의 마음속에 진짜 꿈이 자라는 순간이지 않았을까 생각하게 된다.

 


인혜는 학생회장의 여자친구이기에 자신이 영부인 같은 존재라고 말한다. '이게 무슨 시대착오적인 생각인가?' 싶어지는 순간 인혜는 어린 시절의 경험을 들려준다. 어릴 적 반장선거에 출마한 인혜는 단 한 표를 받았다. 정작 자신은 창피해서 스스로에게 투표하지 않았는데 누군가가 인혜를 뽑아준 것이다. '나를 뽑아준 애는 누굴까? 나는 아직도 그 애를 위해 살아.'

우리는 단 한 명의 지지만 있어도 견딜 수 있는 존재다. 그것 하나가 살아갈 이유가 된다. 반대로 나 또한 누군가의 뜻과 의지와 꿈에 영향을 주는 사람이 된다는 건 그 사람을 지지해주는 일이 아닐까.

아이들이 숲에 텐트를 치고 야영하며 길 없는 곳을 헤매는 과정은 입시 경쟁에서 잠시 이탈한 소녀들이 각자의 '산양'과 같은 자유와 자아를 확인하며 자라나는 과정이다. 시작에 서 있는 자연인이다. 아이일 때는 잘 모르지만 그때의 우정과 꿈들은 분열과 헤어짐을 전제로 하게 되는 것 같다.

산양이 어디든 갈 수 있다는 사실은 현실에서는 아무 데도 갈 수 없다는 점에서 더 동경하게 되기도 한다. 어린 시절 진짜 숲속에서 산양처럼 지내본 기억은 어른의 숲에서도 산양의 정신을 잃지 말라고 말하는 듯하다.
 


눈앞에 보이는 생명 하나를 구하는 일이 눈에 보이지 않는 수많은 생명을 위험에 빠뜨릴 수도 있다. 그러나 아이들이 만들어내는 그 오류에는 생명을 향한 순수함이 있다. 하나의 생명이 곧 수많은 생명의 근본이라는 것. 어른이 되어 생각하는 수많은 생명과 아이일 때 바라보는 하나의 생명 사이에서 생각이 갈등하게 된다. 이 영화는 겪어야 할 일에 대한 선행학습임을 보여주고 다시금 고민하게 만든다.

모든 것에서 장점을 발견하고 칭찬할 줄 아는 정애 역의 박효은 배우는 앞으로 더욱 많이 만날 수 있는 배우가 되기를 바란다. 생존을 위해 늘 준비한다고 말하며 결국 입시라는 현실에서도 생존하게 되는 서희 역의 이승연 배우는 여러 얼굴을 가질 수 있는 배우였다.

그 평범함을 특이하게 보이는 지점으로 연기한 박혜진 배우, 어울릴 듯 어울리지 않게 친구들을 대하며 세 사람의 관계를 네 사람으로 확장하는 수민 역의 최수인 배우까지 모두 건강하고 산양 같은 배우들이었다.

영화 '산양들'을 소녀 모험극으로 만들고 싶었습니다. 학생들에게 미래를 위해 지금을 포기하라고 하지만, 저는 학창 시절에 의미 있는 걸 하고 싶었거든요. 이 영화는 안식처를 만드는 내용입니다. 어떻게 안식처를 완성할지 고민하다가 아이들이 모험을 떠나게 했습니다. 이 네 친구의 선택과 경험이 자신을 지켜줄 거라 믿습니다.
감독 유재욱



안재훈 감독
<소중한 날의 꿈>, <아가미>와 한국 단편문학을 애니메이션으로 만든 <메밀꽃·운수 좋은 날 그리고 봄봄>, <소나기>, <무녀도>를 개봉했다. 현재 장편 애니메이션 <영웅본색2>, <시작하는 나의 세계> 연출을 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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