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문학을 원작으로 한 애니메이션으로 우리 고유의 색과 정서를 세계에 알리고 있는 안재훈 감독의 작품 상영회가 미국 오하이오 주립대학교에서 열렸다. <소중한 날의 꿈>, <메밀꽃·운수 좋은 날·그리고 봄봄>은 현지 학생들에게 어떤 감정과 여운을 남겼을까. 안 감독이 전해온 방문기를 싣는다.
상영에 이르기까지
작품을 만들 때 상업적 성공을 위해 최선의 노력을 다한다. 물론 이런 노력이 모두 목표를 이루는 건 아니지만, 최선을 다한 작품은 끝까지 살아남아 기어코 어떤 곳에 도달한다고 느낀다. 이번 오하이오 주립대에서의 상영이 바로 지금까지와는 다른, 가지 않은 길을 또 한 번 걷게 해줬다. 새로운 계기가 만들어진 것이다. 개인의 계기가 문화 한 분야의 계기가 된다는 것은 중요한 경험이다. 계기는 다양한 곳에서 비롯된다. 그 다양함은 누군가의 노력이기도 하다. 한국 애니메이션이 개봉한 후 좀처럼 상영 기회를 얻지 못할 때, 학교는 찾아가는 극장이 돼 만날 수 없을지도 모르는 관객을 만날 수 있게 해줬다. 근래 들어 학교에서의 상영은 그리 많지 않다. ‘소중한 날의 꿈’ 개봉 당시만 해도 학교 선생님과 교수님들이 많은 상영의 기회를 만들어줬고 이 땅에서 고군분투하는 애니메이션 스튜디오와 학생들이 직접 소통할 수 있도록 도와줬다.
‘참여로 응원하던’ 시대, 뜻있는 선생님과 교수님의 노력 덕분이었다. 청강대학교 이병관 교수님은 학생들에게 한국 애니메이션을 만날 기회를 끊임없이 제공하는 교수님 중 한 분이다. 펼쳐질 저 너머의 세계를 바라보게 하고 이미 지나간 역사가 아닌, 역사가 만들어지는 과정을 직접 보게 하는것이다. 그 선택이 이번 상영회의 시작이었다.
지난해 청강대에서 ‘무녀도’ 가 상영하던 날, 학교 극장 객석에는 오하이오 주립대 이은경 교수님이 자리했다. 휴가차 한국을 찾은 이교수님은 관객과의 대화에도 참여하고 학생들의 질문을 지켜봤다. 특별한 인상을 받은 덕에 우리 스튜디오에도 직접 방문했다.
이 교수님은 픽사를 거쳐 현재 오하이오 주립대에서 디지털 애니메이션을 가르치는 분으로, 학생들을 위해 휴가 기간에 발품을 팔아 한국 애니메이션에 관한 얘기를 귀담아들었다. 이는 오하이오 주립대학생들이 한국 애니메이션을 통해 문화의 다양성을 체험할 수 있는 계기가 됐다.
이번 오하이오 주립대상영회는 이 교수님과 더불어 디지털 아트, 사운드 디자인, 동아시아어학과 등 다양한 전공 교수님들의 열의가 더해져 진행할 수 있었다. 지난 3월 캘리포니아 주립대 상영회 역시 애니메이션과 전혀 연관이 없는 한국 문학 관련 교수님이 우리 스튜디오를 수소문해 연락하고, 미국에서 직접 찾아와 “학생들에게 한국 문화를 애니메이션으로 만나는 기회를 주고 싶다” 는 정성 덕분에 열릴 수 있었다. 오하이오 주립대는 상영회를 준비하는 과정부터 철저했고 따스했다. 연락을 주고받은 담당 교수님들의 메일에서 깊은 기대와 배려가 느껴졌고, 메일함이 쌓여갈수록 그 학교가 더욱 궁금해졌다. 꽉 짜인 일정표 안에는 다양한 방식의 수업 참관 등 학생들과 한 번이라도 더 만나게하려는 마음이 담겨있었다. 교수님들 또한 상영회를 준비하며 사전에 작품을 관람한 뒤 소감을 미리 전했다. 덕분에 모든 준비를 순조롭게 마칠 수 있었다.
첫째 날, 보금자리 같은 도서관
9월 드디어 도쿄국제영화제(TIFF)와 부천국제애니메이션페스티벌(BIAF)에 보낼 ‘아가미’ 의 필름 작업을 마무리하고 오하이오로 떠났다. 학생 대표의 소개로 둘러본 캠퍼스는 마치 공원을 산책하는 느낌이었다. 땅이 굉장히 넓었지만 곳곳에 배려가 깃들어 있었고, 안내하는 학생에게서 학교에 대한 애정과 자긍심이 묻어났다. 무엇보다 인상적인 곳은 도서관이었다. 크고 작은 근사한 도서관들은 학생들에게 은신처이자 보금자리 같았다. ‘이렇게나 공부할 것이 많은가’ 가 아니라 ‘이렇게까지 공부를 하고 싶다’ 는 생각이 들었다. 교정 곳곳에는 학교의 상징인 빨간색 로고가 가득했다. 전해오는 소소한 역사도 박제된 형태가 아니라 점점 학생들의 손때가 묻어가는 모습이었다.
둘째날, <메밀꽃·운수 좋은 날·그리고 봄봄>
다음날 다양한 수업을 참관했다. 디지털 애니메이션과 예술 및 기술에 대한 수업이었다. 가장 기억에 남는 장면은 학생들이 자연스러운 분위기에서 토론을 하며 적극적으로 의견을 주고받는 모습, 그리고 단 한 명의 장애 학생을 위해 점자 타이핑 리스트로 수업을 함께 하는 풍경이었다. 이후 교수 식당에서 동아시아 문화를 연구하는 대학원생과 함께 밥을 먹었는데 ‘무녀도’ 에 대한 질의응답을 시작으로 식당에서 모든 교직원이 나갈 때까지 다양한 주제의 얘기가 오갔다. 지금의 한국이 아니라 그 뿌리에 대해 묻는 대학원생의 깊이 있는 태도를 보며 ‘나 역시 우리의 문화와 역사를 더 공부해야 겠다’ 는 생각이 들었다.
저녁이 되자 마스터 클래스라는 이름의 토크쇼가 열렸다. 상영 전 진행하는 토크쇼였는데 자리를 가득 메운 관객들은 한국 단편 문학의 흐름과 한국 애니메이션에 관한 다양한 질문을 던졌고, 난 미국의 역사적 사건과 비교하며 설명했다. 오롯이 우리 것만을 이야기하는 게 아니라 듣는 이의 역사에 대해서도 ‘나 또한 얼마나 알려고 하는 가’ 가 중요하기 때문이었다. 그런 태도가 있어야 우리의 것에 관심을 갖게 하는 대화가 즐거워진다. 소비가 투표라는 말이 있다. 나의 소비로 건강한 시장을 만들고 균형을 맞출 수도 있지만, 쉽지 않은 일이다. 문화도 그런 듯하다. 내가 소비하는 문화의 폭만큼 한국 애니메이션을 처음 본 사람들 또한 우리에게 마음의 한 표를 준다고 생각한다. 이어서 ‘메밀꽃·운수 좋은 날·그리고 봄봄’ 을 상영했다. 한국 문학을 애니메이션으로 만난 관객들의 여운이 쉬 가시지 않아 관객들의 얼굴을 직접 그려드리며 한분 한분과 대화를 나눴다. 모든 상영이 끝난 뒤에도 한국 교포학생이나 유학생들이 문화해설자가 돼 로비 곳곳에서 설명하고 토론하는 풍경이 펼쳐졌다. 그 모습을 눈에 담아두고 마음에 새겨두었다.
셋째 날, 만화 박물관
이날 방문한 세계 최대의 만화박물관은 덕후가 아니어서 후회하는 나에게 충분한 보상을 해줬다. 이곳에는 스누피의 원작은 물론 수없이 많은 작가의 친필 그림과 메모가 가득했다. 정말이지 박물관의 모든 것이 감탄스럽고 감격스러웠다. 밤비와 포카혼타스를 그린 애니메이터의 책상도 볼 수 있었는데 그 책상에 남아있는 흔적이 작품의 일부여서 가슴이 뭉클했다. 다만 한국의 자료가 테이블 하나 정도에 그쳐 아쉬웠다. 그 또한 오하이오 주립대 김필호 교수님이 애쓰신 것이어서 그저 감사할 따름이었다.
이후 우리 스튜디오에 있는 자료를 모아 특별전 형태로 기증하는 방안을 큐레이터와 논의했다.
넷째날, <소중한 날의 꿈>
‘소중한 날의 꿈’ 상영회는 오래전 안시 영화제의 기억이 되살아나게 했다. 상영하는 내내 한국인들과 똑같은 포인트에서 웃고, 또 다른 포인트에서 웃는 모습을 보며 관객이 영화 속 이랑이의 고민에 집중하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영화가 끝나고 잠깐의 고요함 끝에 한 분이 “브라보!” 를 외치자마자 우레와 같은 박수와 함성이 쏟아졌고 다 함께 작품의 여운을 즐겼다. 이어지는 관객과의 대화에서 미치 레너(Mitch Lerner) 동아시아센터 소장님은 “미국이 이 영화를 왜 놓쳤는지 모르겠다” 면서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 그리고 성장의 길목에서 느끼는, 다르면서도 같은 감정을 관객들과 교환할 수 있었다. 지금까지도 인상 깊이 남은 질문이 있다. 바로 광주로 이어지는 질문이었다. 아마 그날 그곳에 있던 분들은 이번 한강 작가의 노벨문학상 수상에 대해 훨씬 더 공감하고 한국의 창작자들이 광주를 대하는 태도 또한 이해하게 됐으리라.
다섯째 날, 동아리 모임
‘소중한 날의 꿈’ 의 여운은 다음날 애니메이션 동아리 모임으로 이어졌다. 오하이오 주립대에서 최대 규모의 동아리라고 한다. 현재 자신의 모습이 이랑이와 같다는 고민을 얘기했던 대만 학생의 눈가가 희망으로 촉촉했다. 학생들은 처음 만난 한국 애니메이션을 일본 아니메, 할리우드와 비교해가며 차이점과 장점, 앞으로 나아갈 길에 대해 질문했고, 이들과 깊은 대화를 나누었다. 그 외 다양한 수업을 참관하며 디지털 아트에 대해 고민하고 대안을 제시하는 교수님들도 만났다. 이를 통해 ‘내 작업 태도는 진보적인가, 그동안 옛것에 갇혀 있진 않았나’ 하는 생각과 함께 옛 방식을 함부로 버리는 것 또한 역사를 완성하지 못한다는 이중적인 고민을 하게 됐다.
여섯째 날, AI 워크숍
방문 마지막 날, 학교에서 진행한 워크숍의 주제는 AI였다. 필름부터 AI에 이르기까지 난 새로운 기술이 나올 때마다 스태프와 함께 작품에 적용해왔다. 물론 때마다 새로운 시스템을 만드는 일은 너무 힘들었지만 덕분에 지금의 스튜디오로 성장할 수 있었다. 난 이런 경험을 토대로 워크숍에서 현재 우리 스튜디오가 활용하는 AI 작업을 설명했다. AI 활용의 거부감에 관한 얘기부터 어떻게 활용하고 있는지에 대한 선례를 설명하는 건 학생들은 물론 내게도 또 한 번의 정리와 시작을 부여하는 좋은 기회였다. 워크숍이 끝나고 학생들의 그림을 일일이 보며 의견을 나누면서 모든 일정을 마무리했다.
끝맺음
오하이오 주립대는 한국 학생을 기다리고 있고 한국 문화를 궁금해하며 교류를 기대하고 있다. 애니메이션이 문화로 자리 잡으려면 긴 시간의 축적이 필요하다. 현재 변화하는 극장 환경에서 오히려 힘을 발휘하는 건 일본의 극장용 애니메이션 콘텐츠 소비자다. 쌓아온 체험이 소비로 이어진 것이다. 바꿔 말해 지금 우리가 만들고 있는 콘텐츠를 세계에서 선보일 기회가 줄어든다면 축적의 시간 또한 잃게 된다. 문화는 누구의 것을 빼앗는 것이 아니라 더하는 일이기에 다양성을 위한 최선의 노력은 아름다운 일이 될 것이다. 앞으로도 한국의 애니메이션이 세계의 다양성에 기여했으면 하는 바람이다.
아이러브캐릭터 / 장진구 기자 master@ilovecharact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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